최근 몇 년 사이 연애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늘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피드에는 ‘새上衣’니 ‘필터링 데이트’니 하는 신조어가 넘쳐나고, 연애 상담 콘텐츠를 찾는 사람들의 고민도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고민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패턴이 하나 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보다, 상대방에게 “뭐 먹을래?”, “어디 갈래?”, “이거 어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선택을 미루고, 결정을 상대에게 넘기고, 결국 모든 데이트의 방향이 한쪽으로만 쏠린 관계 말이다.
A씨는 데이트 때마다 상대의 제안을 기다렸다. 영화를 봐도 상대가 고른 영화를 봤고, 식당에 가도 상대가 검색해 둔 곳에 갔다. 처음에는 상대가 모든 것을 정해주니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이 엄습했다. “혹시 내가 아무것도 못 정하는 사람이라서 만나는 걸까, 아니면 정말 좋아서 만나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상대는 불만을 표현한 적이 없었는데도, A씨 스스로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점점 낮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사소한 데이트 장소 하나 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결정부터 스스로 내리는 훈련을 시작했다.
이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관계의 주도권은 거창한 선언이나 큰 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아주 작은 선택의 순간들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데이트 장소를 정하는 일, 식당 메뉴를 고르는 일, 다음 만남의 시간을 제안하는 일. 이러한 사소한 결정들이 모여 관계의 균형을 만든다. A씨가 놀라웠던 점은, 자신이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자 상대가 오히려 더 편안해하고 대화의 깊이가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아무거나”라고 말하던 사람이 “지난번에 네가 좋아하던 그 파스타집 어때?”라고 말을 꺼내는 순간, 관계의 무게중심은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존감과 관계 주도권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취향이나 판단이 상대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결정을 회피하고, 상대의 반응에 과도하게 맞추는 안전한 전략을 선택한다. 문제는 이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갈등을 줄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관계의 활력을 고갈시킨다는 데 있다. 모든 결정권을 상대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관계에 기여할 몫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애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협업의 과정이다. 한쪽이 지나치게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르면,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고 이는 누적된 피로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훈련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 첫 단계는 극도로 작은 결정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커피를 마실 때 샷 추가 여부를 결정하고, 영화를 볼 때 몇 시 상영 시간이 좋을지 정하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결정의 크기가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취향을 인정하는 연습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단계는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훈련이다. “나는 이쪽이 더 좋아”라는 표현을 솔직하게 내놓을 때, 상대방은 거절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선택에 책임을 지는 마음가짐이다. 자신이 고른 장소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실패라고 단정 짓지 않고, 다음 결정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경험치로 삼는 태도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연인 사이의 갈등 해결 대화법으로 시야를 조금 넓혀볼 수 있다. 사실 결정을 미루는 습관은 갈등 상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싸움이 났을 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의 분위기를 읽고 먼저 사과하는 패턴. 하지만 건강한 관계에서 갈등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와 기대치를 점검하는 기준점에 가깝다. 예를 들어 주말 데이트 계획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을 때, “네가 좋다는 곳으로 하자”는 말은 상대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동시에 불만을 누르는 행위다. 집 안에 묵혀둔 불만은 언젠가 더 큰 폭발로 이어지기 쉽다. 대신 “나는 오늘은 한적한 분위기에서 걷고 싶은데, 너는 어떤 계획을 생각해뒀어?”처럼 자신의 상태를 먼저 전하고 상대의 생각을 묻는 표현이 훨씬 생산적이다. 이처럼 소소한 일상의 루틴도 주도권 회복 훈련에 활용될 수 있다.
자존감을 높여주는 연애 습관을 만드는 일은 결국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A씨의 사례에서 의미 있었던 지점은 본인의 노력도 물론이지만, 상대가 A씨가 내린 작은 결정들을 존중해준 데 있었다. 상대가 “여기 괜찮네. 너 취향이 이런 거였구나”라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A씨의 다음 결정은 조금 더 쉬워졌다. 이 관계는 우연히 균형을 찾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결론적으로, 관계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과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데이트 장소 하나 정하는 그 작은 순간의 용기가 쌓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에서 한 사람이 나침반을 독점한다면 함께 걷는 의미가 반감된다. 서로가 번갈아 앞장서고, 때로는 나란히 걷는 일. 그 균형을 만들어내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확실한 출발점은, 오늘 밤 우리가 만날 장소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자존감은 결국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작은 선택들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중심을 갖게 된다.